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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풍속

제목
석전놀이 / 해당월 : 1
작성자
관리자
내용
산양면 현리는 금천(錦川)변에 있는 아름다운 마을로 인천 채씨와 그 일가의 동족 부락이다. 이끼 낀 옛 기와집들이 현리가 유서 깊은 마을임을 조용히 일깨워 준다. 현리는 이름 그대로 신라적 근품현의 소재지다. 금천(錦川) 내 하나를 사이로 하여 산북면 서중리와 마주 보고 있다. 서중리엔 대원군때 철폐된 근암서원이 있었던 옛마을인데 안동김씨, 안동권씨, 밀양박씨들이 선의의 자웅을 다투는 마을이기도 하다. 

현리와 서중리 사이엔 석전(石戰)이 해마다 정월이면 벌어졌다. 일제시대 왜경의 금지로 두 마을의 뿌리깊은 친선게임이 중단되고 말았다. 이밖에 문경읍에도 부락간 석전이 있었다 한다. 석전(石戰)이란 서울이나 시골을 막론하고 예전에 흔히 있었다. 부락간의 패싸움인데 그 유래는 석기시대부터 존재한 것 같다. 지금은 은퇴공연한 민속이기에 일종의 향수같은 걸 느끼게 하는데 돌싸움의 유래와 뜻을 다시 살펴보는 것도 단순한 감상만은 아니리라. 석전(石戰)은 국사대사전(이홍직)을 펴보면 음력 정월 또는 5월에 하던 민속놀이며 일명 편쌈이라고 한다. 

한 부락, 또는, 한 지방의 동, 서편으로 나뉘어 수백보의 거리를 두고 돌팔매질을 하여 지는 편이 달아남으로써 승부를 겨루던 놀이다. 처음에는 먼곳에서 던지다가 점차 고조되면 서로 육박하여 6모 방망이를 가진 수령(首領)끼리의 육박전까지 벌어지게 된다. 그 기원은 고구려때에 이미 국가적 연중행사로 임금의 관전(觀戰)하에 시행하였으며, 이는 전쟁에 대비하는 연무(鍊武)의 의의를 가진 전투적 유희, 또는, 실전(實戰)연습의 유희였다. 신라에는 석투당(石投幢)이라는 돌팔매질하는 군대가 있었고, 고려때도 성행하였으며 특히, 고려 우왕은 이것에 깊은 관심을 두었었다. 또, 석전은 전투의 기술로 활용하게 되었으니, 석투반(石投班), 석투군(石投軍)이 곧 그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성했는데, 특히 1510년 (중종 5년) 삼포왜란때는 안동, 김해의 석전선수를 모집하여 왜인을 격파했다. 이는 조선시대 말기까지 연중행사로 전해왔으나 일제때 금지령이 내려 점차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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